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류큐 왕국 (문단 편집) == 외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류큐 무역.png|width=100%]]}}}|| 통일 류큐 왕국의 건국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의 중요한 밥줄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무로마치 막부]])는 10년에 1회 조공을 바칠 수 있었는데, 류큐는 2년에 1회씩이었다. 1470년대 이전까지는 1년에 1회씩이었으나 이후부터는 2년에 1회씩으로 제한된다.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 무역을 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간혹 조공을 일방적으로 한쪽이 바치기만 하는 걸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공을 받는 측에서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많은 하사품을 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공 무역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 중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15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위협이 커져서 조선과 교류하기 힘들어지자, 류큐국은 방침을 바꾸어 일본의 상인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조선과 교류했다.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중심지 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 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 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주변의 나라들에 빗대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 즉 조선을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류큐의 주요한 무역 상품 가운데 토산품으로는 [[말(동물)|말]], 나각(螺角, 소라껍질)[* [[야광패|야광조개]] 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광조개를 가공해 만든 가공품들은 고대 신라,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된다. 신라 고분의 경우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등의 왕릉급에서, 가야고분도 마찬가지로 대가야 왕릉인 지산동44호분에서도 이 류큐열도 특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 해파(海巴, 조개껍질)[* 소라껍질과 마찬가지로 청자고둥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청자고둥을 이용한 공예품은 수도없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금관가야와 신라지역에 청자고동조개를 가공한 말 띠 장식 등이 출토된다], 소가죽, [[유황]][* 오키나와 제도의 화산섬인 [[이오토리섬]]에서 채굴했다. 위치상으로는 [[아마미 군도]]에 더 가깝지만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차질이 갈 것을 고려하여 사쓰마 측에서 류큐의 영토로 남겨두었다.], 파초포(芭草布, [[파초]] 잎 섬유로 만든 천)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도]]와 [[구리(원소)|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아]], [[주석(직위)|주석]], 향신료 등을 가져와서 중개 무역을 펼쳤다. 일본 [[홋카이도]]산 말린 [[다시마]]는 약재로서[* 특히 [[갑상선]] 질환에 특효로 알려졌다.] 중국에 많이 팔렸다. 17세기 이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면서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실의 돈줄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울금]]도 돈이 꽤 되었다는 듯. [[물소]]도 길러서 물소뿔도 생산되었는데 [[조선]]에서 [[각궁]]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편 [[왜구]]가 납치한 조선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나하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하시]]의 구메무라(久米村)에는 구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이라 불리는 [[푸젠성]] 계통의 도래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류큐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일본의 상인들이 직접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데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락하여 류큐의 해외 무역도 힘을 잃고 만다. 류큐와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1570년 [[시암]]([[태국]])으로 배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조공 무역과 일본과의 무역은 계속되어 류큐를 먹여 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